통역의 애로: 예약 시간에 또 늦고 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예고없이 닥칠 수 있다. 멀쩡하게 출근하다가, 학교가다가, 공원을 산책하다가, 죽음이라는 강도는 어느 누구라도 위협할 수 있다. 가진 거 다 달라고 하면 줄 수 밖에 없다. 그러는 순간 오늘 왜 내가 하필이면 기차를 안 타고 버스를 탔는지, 9시에 갈 걸 왜 8시부터 설쳐서 갔는지, 평소에 가던 길로 안 가고 왜 지름길로 가다가 이런 낭패를 당했고 있지 곰곰히 생각해 본다. 하지만 때는 늦었다. 죽음은 이미 뱃속으로 들어왔다.

늦어서 허둥지둥 도시 한복판을 질주하다 보면, 차속에서 가만히, 이대로 내가 사고라도 당해서 죽어버리면, 나의 죽음은 ‘통역사의 죽음’으로 찬양될까. 통역사가 2시에 도착하기를 눈빠지게 기다리던 호주 센타링크 직원과 한국인 실업자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2시 반이 되어도 도착하지 않는 통역사를 각자 조용히 욕하기 시작할 것이다.

통역사 없이 시작된 인터뷰는 의외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둘은 얼굴을 바라보며, 통역이 필요없었잖아. 이래야 영어를 제대로 연습할 수 있는거네. 그럼 다음에는 통역이 필요없으시죠? 그럼요! 그래야 영어가 늘 것 같아요.

기쁜 마음을 돌아서는 그들은 속으로 오늘 사실 통역사가 오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다음부터는 통역사없이 나도 이 정도의 대화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야 영어가 늘잖아, 하고 한국인 실업자는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한 통역사의 죽음이 반드시 나쁜 소식인 것만은 아니다.

한편 한국인 실업자가 돌아서자마자 전화기를 집어든 호주 공무원은 통역 서비스 담당 직원에게 소리를 막 지를 수 있다. 통역사 없이 업무를 하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아세요? 이해되는지도 안되는지도 알 수 없는 표정을 하는 고객을 두고 한 시간이면 끝낼 인터뷰를 2시간동안이나 주절거린 것도 힘들었지만, 되지도 않는 엉터리 영어를 듣는 것도 엄청 스트레스예요. 오늘 예약된 통역사는 다음에 예약하지 마세요. 이렇게 예고도 없이 나타나지 않으면서 다음에 또 예약을 주면 안되잖아요.

그래서 그 통역사는 이제 절대 예약을 받을 수 없다.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추신: 도대체 언제 어떻게 통역사의 고객들은 통역사가 사망했다는 것을 알게 될까? 전화를 받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통역중이거나, 본국으로 돌아갔거나, 아니면 통역일을 그만 두었거나…. 하지만 죽어서 말이 없다는 사실을 언제나 알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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